말세 성도에게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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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9-08 14:13 조회3,340회 댓글0건본문
말세 성도에게 주는 교훈
말세 성도에게 주는 교훈
2011년 01월 21일(금요철야)
본문 / 베드로전서 4:7~11
본문의 말씀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베드로가 보낸 편지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여서 사도들로부터 귀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을 때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한곳에서 수만 명이 모여서 서로 사랑을 나누고, 떡을 나누고, 네 것 내 것이 없이 서로 베풀면서 살며 얼마나 좋고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계획은 예루살렘만 복음화하는 것이 아니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서 택한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핍박을 통해 그들을 다 흩으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는 성도들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정처 없이 다른 나라와 지방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급하게 피난하다 보니 땅이나 집을 처분하지 못했고 가진 것이 없다보니 먹고 사는 것부터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 나라의 임금이나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라가 평안하면,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데도 그만큼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평안하지 못해서 다 흩어지고, 새로운 곳에서 개척하려면 그만큼 어렵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신앙을 지키기도 더 힘듭니다. 성도들이 낙심하고, 믿음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환경이 좋지 않은 곳에서 신앙을 잘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저도 환경이 좋지 않은, 믿지 않는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신앙생활 하기 어려우니까 저는 시간만 나면 교회에 가서 엎드렸습니다. 그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나가 엎드리는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그게 사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흩어져 있고, 흩어진 곳에 주의 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교회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환난과 핍박으로 성도들이 흩어져서 여기저기서 살고 있을 때,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마지막 환난의 때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좋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7절에 보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깨어 기도하라는 것이 첫 번째 교훈입니다.
환난과 시험이 많은 이 세상에서 사는 성도들은 만물의 마지막, 지구의 종말이 가까웠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고 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천 년 만 년 계속해서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잘못된 생각을 하는 사람이고, 그런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들은 신앙의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가 마지막일지 모릅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루하루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바르고 값지고 하루하루를 정말 진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런 자세로 산다면, 웬만한 것 가지고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 먹을 것이 없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 만날 준비를 하면서 살게 됩니다. ‘내가 오늘 이 세상을 떠나면 주님을 만날 수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깨어서 기도하게 됩니다. 아주 뜨겁고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사소한 문제로 싸우거나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그까짓 것 가지고 신경 쓰겠습니까. 웬만한 것은 다 화해하고 용서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오늘 하루 동안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생각하면서 하루를 살게 됩니다. 이렇게 산다면 얼마나 멋진 삶을 살게 되겠습니까.
어느 사모님이 암에 걸려서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믿음 좋은 사모님은 ‘이제 나는 3개월 후면 천국에 가겠구나. 천국에 갈 준비를 마지막까지 잘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모님은 3개월 동안 성도들을 열심히 심방하고, 마지막 인사라고 생각하며 집집마다 찾아가서 기도해주고 축복해주었습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정성을 다했겠습니까. 사모님은 자신이 죽는 그 순간까지 충성하겠다고 생각하고, 성도들을 잘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암에 걸려서 낙심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충성하니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집회 인도한 교회의 장로님이 참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50대 정도 되어 보이고, 저보다 키가 좀 크신데, 얼마나 겸손하신지, 식사하며 이야기해보니 회사에서 1만 2천 명의 사원을 책임지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5년 전쯤 공사장에서 떨어져 머리가 바닥에 부딪혀 머리를 많이 다쳤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이렇게 되었는데도 죽지 않은 것이 기적이지만, 머리에 있는 신경망은 다 손상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신경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되어 치료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충성스러운 장로님 내외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장로님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의학적으로 100% 불가능하다고 해도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믿으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의심하지 마십시오. 물러서지 마십시오. 중단하지 마십시오. 기어코 돌파하십시오. 성취하십시오. 응답 받으십시오. 불을 받으십시오.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절대로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부르짖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면 누가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여러분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가 물러서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있을 징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큰 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오실 날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자다가 들리어 갈 수도 있고, 맷돌을 갈다가 들리어 갈 수도 있고, 밭에서 농사짓다가 올라갈 수도 있으니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44절에 보면,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언제 오셔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해놓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1장 34~3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3장 11~1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이 가까워져 왔음을 아는 자들에게 지금은 깰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고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 보면,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기도는 영적으로 깨어있게 해줍니다. 기도는 우리를 영적으로 깨어있게 만들어줍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게 만드는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깨어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영적으로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잠자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깨어 기도하지 아니하면 영적 성장이 중단됩니다.
나무를 기르거나 아이들을 양육할 때, 세월이 가면 나무도 아이도 자랍니다. 그러나 신앙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서도 20년, 30년 신앙생활 했기 때문에 자기의 신앙이 좋다고 착각합니다.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세월이 간다고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아야 자라나는 것이지, 저절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완전히 침체해서 그 상태 그대로 굳어져 버립니다. 이것은 나무가 자라지 않고 작은 나무로 머물러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은 저절로 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깨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 성장이 중단되고, 오히려 믿음이 약해집니다. 기도생활을 하지 않으면 믿음이 약해져서 자꾸 시험에 빠지게 되고, 시험에 들 만한 일이 아닌 일에도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아서 시험 드는 줄도 모르고 더 기도하지 않습니다.
어떤 시험이 와도 입을 꼭 다물고 기도만 하면 시험이 시험이 되지 않고 없어져버립니다. 이 비밀을 꼭 기억하십시오. 어떤 시험이 와도 입을 열면 안 됩니다. 그러면 시험이 더 커지고 복잡해집니다. 어떤 어려움과 시험이 와도 입 꼭 다물고 기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은혜를 주시고, 시험을 해결해주십니다. 시험이 시험이 되지 않게 해주십니다. 오히려 시험을 축복으로 바꾸어주십니다. 간증거리로 바꾸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어려운 시험이 있을 때 우리는 입단속을 잘해야 합니다. 입 다물고 기도만 하면 성령이 다 해결해주십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 전쟁에서 패하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이 약해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 고갈이 옵니다. 그래서 영적 전쟁에서 힘을 쓸 수 없습니다. 그냥 패합니다. 낙심하게 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걱정만 하고 앞길이 막연하게 느껴집니다. 때로는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사단이 완전히 짓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해결책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길밖에 없습니다.
기도가 죽으면 다 죽습니다. 기도의 불이 꺼지면 믿음도 죽고, 그 사람의 삶도 마귀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교회가 문을 닫게 됩니다. 가정도 타락하게 됩니다.
옛날 유럽은 대부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유럽의 교회들을 보면 아주 잘 지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가 다 비어있습니다. 그곳에서 예배드리는 곳이 없습니다.
교회가 술집이 되기도 하고, 포도주 창고가 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회교도들의 회당이 되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기도하는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셨을 텐데, 그 한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지금 성전이 세 번째 성전인데, 두 번째 성전을 지었을 때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 당시 수십억 원을 들여서 성전을 짓고 보니, 제 마음에 ‘그 돈을 은행에 넣어두면 많은 이자가 많을 텐데, 아깝다.’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배 드리는 시간 외에는 사용하지 않으니까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기도하다가 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기도하는 종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아깝지 않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성전에서 혼자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깜깜한 한밤중에도 혼자 교회에 와서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아주 너무 행복합니다. 우리가 300억 원을 들여서 지은 이 성전도 기도하는 여러분이 있는 한, 아깝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고 엎드리는 사람, 기도의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한국 교회에 어려움이 많습니다만, 그래도 한국 교회가 힘이 있고, 신학교에 학생이 넘치고, 한국 교회가 살아있는 이유는 한국에는 새벽기도가 있고 철야기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죽으면 다 죽을 수밖에 없는데, 한국교회는 기도가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갈 각오를 하면서까지 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것을 지켰습니까. 다니엘은 죽더라도 기도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중단되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차라리 사자의 밥이 되더라도 기도하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그 믿음으로 기도했기 때문에 승리했습니다. 시험이 간증 거리로 바뀐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기도생활이 중단되면 안 됩니다. 기도생활이 약해지거나 깨어 기도하지 않고 바쁘다는 핑계로 적당히 기도생활하면 믿음이 죽고, 결국 삶도 황폐해져서 죽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처음에는 정금을 입힐 정도로 잘 지어졌지만, 하나님의 성전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기 때문에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끊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어떠했습니까? 성전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 양 파는 사람들, 비둘기 파는 사람들 때문에 완전히 시장바닥이 되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장사꾼들이 교회를 두고 이익을 나누는 형편없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마 21:13).
기도가 죽으면, 성전은 아무 쓸데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성전이 은혜의 자리가 되고, 축복의 자리가 되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영광의 자리가 되고, 기적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리가 됩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장소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 장소가 됩니다.
우리가 전도를 많이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지옥 갈 영혼들 천국 가게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지만 전도하는 일이 아무리 중요해도 열심히 전도하느라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전도도 못 하게 되고, 영적으로도 죽습니다. 전도하려면 충분한 기도의 뒷받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도 기도하는 시간을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도할 시간이 되면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절대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는데 우리가 기도를 소홀히 해서야 되겠습니까. 절대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가 뒷받침된 후 은혜로 봉사해야 그 봉사 자체가 은혜가 되고, 봉사했을 때 행복하고 열매도 좋고 축복이 됩니다. 은혜 가운데 봉사하지 못하면 오랫동안 봉사하지 못합니다. 봉사하다가 짜증이 나고 원망도 생기고 불평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밑받침이 없이는 봉사도 오래 할 수 없습니다. 열매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한나라는 한 여인의 기도로 말미암아 기도하는 아들 사무엘을 얻게 하셨고, 이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의 사람 때문에, 한 여인의 기도 때문에 이스라엘이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 시대를 보면 한 여인의 기도가 얼마나 축복이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가 기도의 사람 다윗에게로 이어졌습니다. 기도의 사람, 은혜의 사람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아주 창대해집니다. 주변국을 다 정복하고, 대국이 됩니다. 기도의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뜻을 이루시며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십니다. 기도가 나라를 살리고, 기도가 민족을 살리고, 기도가 교회를 살리고, 기도가 가정을 살립니다.
그러므로 만물의 마지막 때에 우리가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환경이 바뀌고, 사업이 바쁘고, 몸이 아파도 기도하는 것은 절대 양보하면 안 됩니다. 이것 하나 꼭 붙잡고 있으면 승리합니다.
둘째,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보면,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환난의 때가 되면, 불법이 성해집니다. 법을 어기는 죄를 얼마나 많이 범하는지 모릅니다. 예수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도 거짓말을 곧잘 합니다. 불법이 성하다 보니까 사랑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사랑하려고 했는데 상대방이 불법을 행하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멈춰집니다. 사랑이 식기가 너무 쉽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 마지막 때에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죄가 가득하고 배신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사랑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버리면, 곧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버리면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게 됩니다. 사랑을 버린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한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자라야 하나님께 속한 자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한일서 3장 10절에 보면,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마귀의 자녀라는 의미입니다.
그 사람이 천국 백성인지 지옥 백성인지, 하나님의 백성인지 마귀의 백성인지 마지막 때가 되면 다 드러납니다. 알곡은 알곡대로, 가라지는 가라지대로 드러납니다. 마지막 심판 때가 되면 다 드러납니다. 우리 눈으로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평생 교회에 다녔어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마귀의 자녀라는 것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불의한 짓을 행하는 것을 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4~15절에 보면, 사도 요한은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 자체를 잃어버려서 우리 안에 미움이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이고, 그 사람에게는 영생이 거하지 않습니다. 영생 얻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남을 미워할 자유가 없습니다. 미운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사인인 줄 알고 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녀입니다. 천국 백성입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에베소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긴다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없어진다는 의미입니다. 교회가 사랑을 잃어버리면, 교회가 없어지게 됩니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수영로교회 성도들의 사랑이 점점 더 뜨거워져서 뜨겁게 사랑하면 그 사랑이 그리워서라도 많은 사람이 구름 떼와 같이 몰려올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부흥되지 않고 시끄럽고 골치 아픈 이유는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그 교회는 촛대가 옮겨진 교회가 됩니다.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때에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기독교의 진리가 아닙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한마디로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계명의 시작과 끝도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계명을 이룬 사람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타락하게 되면, 사랑이 식어지고, 사랑이 약해지고, 사랑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행함이 없습니다. 말로만 사랑이라고 하고 실제로 행함이 없습니다. 사랑의 행위가 있어야 하는데 사랑의 행위가 없습니다. 입으로만 “사랑, 사랑”하고 진실함이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행함이 따라와야지, 행함이 따라오지 않으면 죽은 신앙입니다. 껍데기만 있고,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힘이 없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과 같습니다.
셋째, 베드로전서 4장 9절에 보면,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대접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아주 좋은 것입니다.
그 사람이 참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백성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증거는 남을 대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 대접을 얼마나 잘했습니까.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도 반가워하고 잘 대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이고 인격이고 삶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자손이 되었다는 증거는 아브라함과 같은 마음과 대접하는 태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전, 두 천사가 확인하기 위해서 롯의 집에 갔습니다. 그때 롯은 엉성한 대접이었지만 그들을 대접했습니다. 나그네를 영접하고, 두 천사에게 집으로 들어와서 쉬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 사람들이 떼를 지어와 집에 있는 두 사람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나그네가 왔을 때 영접하고 쉴 곳을 제공하는 사람과 나그네가 왔을 때 해치고 못된 짓을 하려는 사람은 완전히 대조를 이룹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백성, 천국 백성,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모습을 나타나는 것이고, 후자와 같은 인간은 아주 멸망할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절대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멸하십니다.
모르는 사람이 우리 동네에 오면 도와주려고 하고 대접하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표식입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 구원 받은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나 몰라라 하고 냉정하게 대하고,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사사기 19장에 보면, 베냐민 사람들이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사는 레위인이 행음하고, 베들레헴으로 도망간 첩을 찾으러 처가로 갔다가 그 첩을 찾고 다시 집으로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가는 길에 유숙해야 하는데, 이방인의 마을로 가는 것을 싫어해서 동족인 베냐민 사람들이 사는 기브아로 갔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인심이 고약했는지, 영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침 그곳에 사는 에브라임 출신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노인의 집에서 유숙하는데, 그날 밤 동네 불량배들이 와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했던 것과 같이 나그네를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사사기 19장 22절에 보면,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나그네를 상대로 음란한 짓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악한 사람들입니까.
그래서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진멸하셔서 베냐민 사람들은 여자와 아이는 다 죽고, 남자 600명만 남게 됩니다. 아예 씨가 말라버렸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모르는 사람이 왔을 때, 도와주려고 하거나 잠잘 곳을 내어 주려고 하느냐, 아니면 그 사람에게 악한 행동으로 해를 입히느냐를 보면, 인간이 얼마나 악해졌나를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0장 14~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는 어떤 동네에서 온종일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에서 잠을 자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영접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 집이나 성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 소돔, 고모라보다 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이 왔는데, 대접할 줄 모르고, 잘 곳이 없는데도 모른 척하는 사람은 소돔 고모라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마지막 때에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라도 항상 도우려고 하고, 대접하려고 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4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 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8절에 보면,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성도들을 저버리면 그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의 이 말씀을 분명히 알고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밤낮 복만 빌고 자신을 위해서만 살면 안 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를 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대접할 때도 원망 없이 해야 합니다. 대접하면서 원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랑이 식어졌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메말랐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대접하면서 원망하지 말라는 이 말은 우리가 대접할 때 감사하면서 대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대접할 기회를 주셨으니 감사해야 하고, 대접할 마음을 주셨으니 감사해야 하고, 대접할 수 있는 물질이 있으니 감사해야 하고, 대접하므로 또 내가 대접 받을 자가 되니까 감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대접 받기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대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대접하는 자가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대접 받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먼저 대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늘 감사하면서 대접한다면, 감사가 있는 곳에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고, 사랑이 있고 축복이 있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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