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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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6-12 10:20 조회3,262회 댓글0건본문
복 있는 고난
복 있는 고난
2009년 02월 15일(주일예배)
본문 / 베드로전서 3:13~17
사도 베드로가 여러 나라, 여러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는, 오늘날 고난이 많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위로가 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도 있고, ‘죄가 있어서 매를 맞는 고난도 있고, 선을 행함으로 받게 되는 고난도 있다고 했습니다.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은 이유를 모르는 고난입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애매하게 누명을 쓰기도 하고,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당하는 고난 가운데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유를 알지만, 억지로 당하는 고난도 있고, 자발적으로 받는 고난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만, 피하지 않고 자원해서 받는 고난입니다. 이렇게 고난의 성격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고난의 성격을 잘 구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본문에서도 고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선을 행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19편 165절에 보면,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롭고 선하게 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평안을 주십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장애물이 없게 하고,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사도 베드로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도 고난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특별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고난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선을 행했는데도 고난이 오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반드시 있다는 의미입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에게만 고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는 자에게도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다만 어떤 성격의 고난을 받을 것인가, 고난이 왔을 때 어떤 자세를 가질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고난은 다 똑같지만,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은 복됩니다.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보면,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난을 통해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컸기에 다윗은 이렇게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은 괴롭지만, 그 고난 때문에 큰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죄 가운데 살던 사람이, 고난 때문에 죄에서 멀어지게 되고, 예수님을 잘 믿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 고난은 바로 축복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늘 다투고 싸우기만 하던 가정이 고난당한 뒤부터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게 되었다면, 고난은 축복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모는 아이를 뱃속에서 10개월 동안 키운 후, 엄청난 해산의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 아이를 낳게 됩니다. 해산의 고통을 당할 때에는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동안 얻는 기쁨이 크기에, 그 고통을 각오하고 아이를 또 낳습니다. 이렇게 고난을 통해서만 사람다운 사람이 만들어집니다.
요즘은 군대 생활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남자들이 군대에 가서 훈련하는 동안에 받는 고통은 여자들이 해산할 때 받는 고통과 비슷합니다. 특히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는 모범생으로 자라난 청년일수록 군대에서의 고통은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잘못된 일도 하지 않았는데, 이유 없이 매맞거나 기합을 받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군목으로 공군 장교 훈련을 받았지만, 숫자가 적어 일반 장교들과 같이 훈련을 받았습니다. 부대 안에는 서울 법대를 졸업한 판사와 검사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범생들이요, 수재들이었습니다. 고시 공부를 한다고 몸은 쇠약하지만, 참으로 착실하여 매 맞는 것을 모르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훈련소에서 첫 점호를 하는 날, 부대장들이 큰소리를 지르면서 무엇을 외워보라고 했습니다. 평소에는 잘 외우는 사람도 너무 긴장해서 외우지 못해 묻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면, 바로 주먹이 가슴으로 날아옵니다. 교관들이 있는 힘을 다해서 훈련병들을 때립니다. 얼마나 많이 맞았던지, 그들의 가슴이 시커멓게 멍든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또 그들은 아침마다 구보를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맨 몸으로 철모를 쓴 채 총만 들고 비행장을 돌지만, 날이 갈수록 배낭의 짐이 점점 무거워집니다. 나중에는 완전 무장을 하고 대전에서 계룡산까지 구보로 다녀왔습니다.
처음 입소했을 때에는 약했던 몸이 군대에서 훈련을 받다보니, 체력이 강해지고 튼튼해졌습니다. 전쟁터에 나가 이기려면, 고된 훈련을 거쳐야 합니다. 고된 훈련을 통해 군인이 되면, 생각이 달라지고. 세상을 보는 눈도 많이 달라집니다.
고난으로 인해 악해지는 사람이 간혹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 더욱 겸손해지고, 고난을 통해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가 됩니다. 까다로운 사람, 모난 사람이 부드러워지는, 성품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들이 인정도 많습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인내심이 강해져서 잘 참고 견딥니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고난이 없이 참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난 없이 참 신앙인도 될 수 없습니다.
저는 가난한 가정에서 고생을 많이 하면서 자라게 한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단 하루도 기도를 걸러본 적이 없었습니다. 가난의 고통 때문에 날마다 교회에 나가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부르짖으며 기도하다 보니 은혜를 받게 되었고, 주님을 만나는 체험도 하게 되었고,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나니,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겪습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해서 지옥에 갈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에 가게 하는 것이 가장 귀한 일이요,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대학을 졸업한 후에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제가 부잣집에서 편안하게 걱정 없이 자랐다면, 그런 기도를 했을까요? 주님의 은혜를 받았을까요? 당연히 기도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은혜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저를 가난하게 자라게 해주신 하나님,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1982년 미국 유학 시절, 수업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수영로교회에서는 날마다 새벽 예배를 드리고, 철야기도회를 어떻게 드리는지 설명했습니다. 수업을 마치자 미국인 교수가 저를 찾아와 “도대체 기도할 것이 뭐 그리 많아서 그렇게 밤새도록 기도를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교수는 5분 이상 기도할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걱정거리도 없고, 언제나 편안하니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교수는 밤새도록 기도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고난이 없는데도 열심히 기도하고 은혜를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돈이 많고 건강하고 모든 일이 잘되는 사람이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찾아보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마태복음 19장 23~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돈이 많고 건강하고 만사가 잘되어 걱정거리가 없는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여러분, 부자가 아닌 것을 감사하고, 건강하지 못하고 연약한 것을 감사하십시오. 오히려 그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으며 믿음으로 사는 것을 감사하십시오.
우리들에게는 고난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복음을 전하려면,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고난을 각오하지 않으면, 선교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선교지에 많이 다녀보았습니다. 한 번은 인도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인도 사람들 중에는 가장 가난하고 천한 계층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는 곳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많고, 따라서 교회도 많이 생겼습니다. 인도 선교사는 저를 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의자도 없이 땅바닥에 앉아있었습니다.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 모릅니다.
예배당 건물은 간신히 지었지만, 화장실도 없는 곳에서 생활합니다. 선교사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방글라데시에 갔는데, 그 나라는 인도보다 더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길을 가다보니, 호수처럼 물이 고여 있는 곳이 보였는데, 쓰레기 썩는 냄새가 났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은 더러운 물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은 그런 물을 먹고 살다가 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저는 그들에게 ‘살아 있는 순교자’라고 말했습니다.
고난 없이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고, 영광되게 살 수도 없습니다. 고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본문 13~14절에 보면,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은 복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장차 받을 상급과 영광이 크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16~18절에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을 상속 받을 자입니다. 영광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 10~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의를 위해 고난 받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감옥에 갈 사람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의를 지키려고 그 유혹을 뿌리쳤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고생했습니다.
의를 위해 고난 받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큰 뜻을 이루시고,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총리로 세우시고, 요셉을 통해 70여 명의 이스라엘 사람이 수백만 명의 큰 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의를 위해 고난 받을 때,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첫째,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라고 했습니다(본문 14절).
그들은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불신앙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하고, 심판을 두려워하고, 지옥을 두려워하고, 저주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면 성공입니다. 또 그들이 두려워하는 심판이나 지옥이나 저주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생각하면 됩니다.
둘째, “근심하지도 말고”라고 했습니다(14절).
하나님은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자를 기뻐하시고,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책임져주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고 했습니다(15절).
고난을 통해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마다 ‘내 잘못은 없나?’, ‘내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나?’라고 생각하며 언제나 마음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넷째,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했습니다(15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여 애통해하며 슬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눈물도 흘리지 않고 오히려 찬송을 부릅니다.
이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때 우리는 대답을 잘 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가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찬송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 ‘겸손한 마음’으로 대답해야 합니다. “사실은 저도 슬픕니다. 하지만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잠시의 이별입니다. 머지않아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됩니다. 천국으로 이사 간 그들은 이 세상보다 더 좋은 낙원에서 평안을 누리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슬퍼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겸손히 대답해야 합니다.
또 ‘두려움으로 대답해야 합니다. 내 말, 내 대답이 잘못 되어서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인격에 합당하지 못한 자세를 보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두려운 마음으로 대답해야 합니다.
특히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복음을 증거하여 예수 믿게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또 우리의 신앙을 간증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회가 왔을 때에는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대답하십시오.
다섯째, “선한 양심을 가지라”라고 했습니다(16절).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양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양심에는 선한 양심, 상처 난 양심, 병든 양심, 악한 양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마음속에 항상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양심이 병들었거나 일그러져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깨끗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고난이 있을 때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양심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양심은 선하고 깨끗하고 밝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헐뜯는 자들이 도리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여섯째,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17절).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기에, 우리가 선을 행했는데도 고난을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이 말씀을 마음속 깊이 새기십시오.
고난 많은 세상에 살면서 선을 행할 때, 의를 위해서 받는 고난에 감사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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