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의 고난에 대한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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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6-12 09:58 조회3,493회 댓글0건본문
성도들의 고난에 대한 자세
성도들의 고난에 대한 자세
2009년 01월 25일(주일예배)
본문 / 베드로전서 2:18~25
성경을 보면,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고난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할수록 고난은 더욱 심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사는 복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들에게도 왜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고,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또 한 부류는 시민권은 없지만, 자유롭게 사는 자유인들입니다. 나머지는 시민권도 없고, 자유도 없는 노예들입니다. 노예들은 사람이지만,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노예들은 주인들의 재산목록이었습니다. 그래서 물건처럼 마음대로 사기도 하고, 팔기도 했습니다. 그런 자들이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로마에서는 노예들을 이용해서 큰 건물을 짓기도 했고, 전국의 도로망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품삯을 줄 필요도 없었습니다. 노예의 주인은 노예에게 채찍으로 때려가며, 중노동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힘센 노예들은 전투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게 했습니다. 심지어는 상대편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로마시민들은 이런 잔인한 일을 오락처럼 즐겼습니다. 로마 시민들이 얼마나 악독한 사람들입니까.
이렇게 하니 노예들은 점점 더 반항하게 되고, 성질이 포악해졌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점점 타락하게 되고, 노예들은 더 포악해져갔습니다. 결국 로마는 멸망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때에 노예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는 노예들을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대해 주었고, 사랑하는 친형제같이 대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노예들에게 복음이 급속도로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노예들은 주인에게 순종할 뿐만 아니라, 주인을 사랑하고, 주인을 위해서 기도하고, 충성을 다 했습니다. 로마 시민까지 그 모습에 감동 받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노예들이 로마를 복음화 하는 데 크게 공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교회마다 노예 신분을 가진 성도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베드로는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환’은 노예 신분을 가진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는 사환들은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두려워하라’는 것은 형벌이나 처벌에 대하여 두려워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직 모든 것을 아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라는 의미입니다. 주인이 선하고 관용이 있는 사람이든지, 까다로운 사람이든지 상관하지 말고 모든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교훈했습니다.
주인들 중에는 마음씨가 좋은 주인도 있었습니다. 노예들이 일을 열심히 하고, 큰일을 했을 때에는 상급을 주기도 했습니다. 노예들은 자기의 소유물이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주인에게 상급을 받아 그 돈이 많아지면, 자기의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인이 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런 주인들은 자연히 노예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었고, 노예들은 기쁨으로 주인에게 목숨을 걸고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까다로운 주인에게는 충성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저 눈치껏 시간이나 보내며 적당히 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주인이 어떻게 하든지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베드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세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 죄가 있어 매를 맞는 고난,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고난을 얼마나 받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고난이 왔을 때에 어떤 자세를 가지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고난이 왔을 때, 그 고난을 신앙적으로 대처하느냐, 아니면 불신앙적으로 대처하느냐, 그 고난을 긍정적으로 대처하느냐, 부정적으로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납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을 신앙적으로 대처하고, 긍정적으로 대처하기만 한다면, 그 고난은 반드시 축복으로 바뀝니다.
첫째,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라고 했습니다(벧전 2:19).
본문에서 말하는 ‘고난’은 애매하게 받는 고난입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억울하게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 고난은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절대주권이 하나님께 있으므로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어떤 고난도 올 수 없음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에 보면,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며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고난이 왔을 때,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고난이 왔을 때에 기도하면, 자신의 죄를 깨달아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자신이 당한 고난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는데, 기도하면 바르게 살지 못한 죄,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가 깨달아집니다. 그래서 회개하다 보면 겸손해지고, 거룩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날마다 구름 한 점도 없이, 햇볕만 내리쬐는 날이 계속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땅은 사막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가 오고, 눈이 내려야 합니다. 어떤 날은 비가 많이 와서 홍수로 인해 집이 떠내려가는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눈이 너무 많이 내려 교통사고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눈과 비로 인해 땅이 좋아집니다. 그래서 고난이 와도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축복이 됩니다.
둘째, 고난이 왔을 때에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는 낮에는 태양빛이 뜨겁고, 밤이 되면 기온이 내려가 얼마나 추운지 모릅니다. 물도 없습니다. 농사도 지을 수 없습니다. 전갈과 불뱀이 사람을 위협합니다. 또 독충에게 물려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면서 고생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 일로 많은 사람들은 원망 불평했지만, 하나님께서 광야 길로 인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깊은 뜻과 섭리가 있고,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목적은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먹여주셨습니다. 반석에서는 생수가 나게 하셔서 그들이 목마르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고, 보호하셨고, 먹이셨는가를 40년 동안 날마다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똑바로 알게 되었고, 믿음이 점점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목적은 가나안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광야 대신에 살기 좋은 땅으로 인도하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그 땅에 머물었을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가면 전쟁을 치르며 그 나라 사람들과 싸워야 하는데, 좋은 땅을 놔두고 광야로 가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길로 인도하셔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사모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도 모르고 원망 불평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괴로운 광야 길에서 기도했더라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기쁨으로 순종하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요셉은 고난 당할 때,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많이 했을 것입니다. 믿음 좋은 요셉이 쇠사슬에 묶여서 애굽의 노예로 팔려갈 때, 얼마나 울부짖으며 기도했을까요. 요셉은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이 형들한테 잘못한 것을 깨닫고 회개했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요셉은 형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아버지에게 일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요셉을 특별히 사랑해서 채색 옷을 입히고, 다른 형제들과 차별하니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더 받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형들이 왜 자기를 미워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요셉이 고난 가운데 기도하면서, 형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깨닫고 회개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할 때, 거룩해지고 겸손한 마음이 생깁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은 자기가 노예가 되어 팔려간 것은 절대주권을 가진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또 요셉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형님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형님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자기를 먼저 애굽으로 보내셨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창세기 45장 5~8절에 보면, 요셉은 형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집안을 구원하고, 애굽을 구원하려고,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깨달음입니까. 요셉은 형님들을 미워하지도 않았고, 형들에게 보복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를 다 용서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요셉이야말로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슬픔을 참음으로 하나님의 크신 뜻과 섭리를 이룬 모범적인 인물입니다.
이렇게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시나리오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을 주실 때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라는 말씀을 믿고, 고난을 잘 이겨야 합니다.
둘째,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라고 했습니다(벧전 2:20).
죄가 있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보응이요, 형벌이요, 심판입니다. 이런 고난은 자신이 잘못해서 받게 되는 것이기에 부끄러운 고난입니다.
사실 우리가 당하는 대부분의 고난은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내 죄 때문에, 내가 잘못한 죄 때문에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있어 고난당할 때에는 회개하는 일밖에는 살 길이 없습니다. 회개하면 고난이 축복으로 바뀝니다.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한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은혜를 주십니다.
은혜를 받으면, 은혜를 받을수록 믿음의 사람이 되고, 은혜를 받을수록 겸손한 인격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고난이 축복이 됩니다. 특히 죄 때문에 고난당하다가 회개하고, 예수 믿어 구원 받게 되었다면, 고난은 큰 축복이 됩니다. 고난이 없다면 예수를 믿지 않을 사람인데, 고난으로 인해 예수 믿고 천국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귀한 축복입니까.
셋째,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라고 했습니다(벧전 2:20).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았다면, 이 고난은 최고의 가치가 있는 고난입니다. 이것은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도 아니고,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도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원해서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어느 집에 불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 불길 속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불 속에 들어가서 사람을 건지려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사람을 살리려고 불 속에 뛰어 들어가서 그 사람을 업고 나왔다면, 몸이 부상을 당하고 화상을 당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받는 고난은 아름답고 귀하며 가치 있는 고난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사자 굴에 들어갈 줄 알면서도 평소대로 기도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금 신상 앞에서 절하라고 왕이 명령할 때에도 절하지 않고 풀무 불에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고난입니까.
사도 바울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헐벗고 굶주리고 순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고난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고 귀한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베드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셔서 그 본을 보여주셨고, 그 자취를 따라가게 하셨습니다.
본문 22~23절에서 베드로는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라고 예수님이 고난당하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릴 때에도 못을 박는 사람을 위협하거나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묵묵히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그들의 영혼을 부탁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우리도 예수님의 그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본문 24절에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스데반 집사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가장 선한 일은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다가 죽을 때,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었습니다. 돌로 내려치는 그들을 위협하거나 욕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은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았다면, 주님 앞에 받을 면류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고난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고난을 당할 수도 있고, 부당한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선한 일을 했는데도 고난이 올 때가 있습니다.
어떤 고난이 오든지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신앙적, 긍정적으로 대처해서 고난이 축복이 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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