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 되지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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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5-24 13:03 조회3,544회 댓글0건본문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지 말라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지 말라
2003년 02월 02일(주일예배)
본문 / 야고보서 1:12~15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어주신 예수님이십니다.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고, 말씀하신 것은 끝까지 책임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13:15). 그러나 이 약속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오랜 기간 동안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점점 희미해졌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씨를 말리려는 애굽의 정책으로 인해 아들을 낳으면 모두 죽었습니다.
이런 암울한 상황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모세를 세우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셔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가게 하셨으며, 광야 길을 경유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사실 광야는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몹시 추운 곳으로 마실 물도 없습니다. 사람은 물론 짐승도 살 수 없으며 불뱀과 전갈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친 광야를 지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광야 길로 인도하신 이유는?
첫째,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셋째,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넷째,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섯째,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놓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알게 하시되 체험적으로 더 깊이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똑바로 알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광야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셔서 한낮의 뜨거운 태양열을 가려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셔서 모진 추위와 어두움으로부터 보호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내려주셔서 먹거리를 해결해주셨으며, 물이 필요할 때마다 반석에서 생수를 내어주시고, 쓴 물을 단물이 되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고사는 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구체적으로 완벽하게 준비하시고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기뻐한 것이 아니라, 메마른 광야만을 바라보며 불안해하고 근심하다가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광야와 같은 험한 세상에서 사는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지켜주시고 먹여주시고 보호해주시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도해주신 좋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늘 감사하고 기뻐하면 하나님께 영광이요 우리 자신에게도 복이 되지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지러운 세상만 바라보면 절로 한숨이 나오고 원망불평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광야에서 잘 견디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에 염증을 느끼고, 이 하찮은 음식이 싫다고 원망 불평했습니다(민 21:5). 예전에 애굽에서 먹던 여러 가지 음식들을 그리워하며, 차라리 애굽에서 노예생활하던 그때가 더 나았다고 소리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목놓아 슬피 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메추라기를 보내주셔서 이들의 코에서 냄새가 날 정도로 한 달 동안 실컷 먹도록 하셨습니다(민 11:20). 이처럼 오랜만에 고기를 실컷 먹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결코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절제하지 않고 폭식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귀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들은 이때 죽은 사람들의 무덤을 가리켜 ‘기브롯 핫다아와’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곧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입니다(민 11:34).
사람은 누구나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욕망에는 신령한 욕망과 세속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여생을 살아볼까?”하는 신령한 욕망을 가진 사람이 있는 반면에, 예수를 믿어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많이 있습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쾌락을 누리고 싶어 하는 욕망, 출세하고 싶어 하는 욕망, 자식을 많이 낳고 싶어 하는 욕망, 건강한 몸으로 오래오래 살고 싶어 하는 욕망 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더구나 이런 욕망을 채울 수만 있다면 참으로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세속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돈을 벌고, 어떤 사람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무시하고 양심을 저버립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이런 욕망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일시적인 만족이 있을 뿐 참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점점 더 큰 욕망을 가지게 되고, 결국 욕망의 노예가 되어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뿐, 아무리 먹고 싶던 음식도 실컷 먹고 나면 또 다른 것을 찾게 됩니다.
이처럼 욕망을 이루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더 커지는 것이 보통 사람의 심리입니다. 따라서 욕망의 노예가 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부모형제도 보이지 않습니다. 온갖 죄를 다 범하게 되고 결국 멸망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본문 야고보서 1장 15절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들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6~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그 나무의 열매를 쳐다볼수록 생각할수록 더 먹고 싶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결국 마귀에게 속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그 결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경고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간은 늙고 병들어 죽게 되었고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얼굴에 땀이 흐르도록 노동해야 먹고 살 수 있었으며, 여자는 자손을 얻기 위해 해산의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가면서까지 먹고 싶은 욕망을 자제하지 못하고 열매를 따먹은 죄의 값입니다. 그 결과 자신이 불행해진 것은 물론 자자손손 저주와 고통과 죽음을 물려주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절제 없는 욕망이 오히려 화가 되고, 불행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는 자식을 몹시 갖고 싶어서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들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번성하게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참으로 바라던 중 희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후 10년이 지나도 자식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85세가 되었고, 사라의 나이 75세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습니다. 자식을 낳을 희망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연히 하나님의 약속은 희미해져갔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한 사라는 애굽 여인 하갈을 자기 남편에게 첩으로 주어 아들 이스마엘을 낳게 했습니다.
이 때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아마 온 동네 사람들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뿐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은 하갈은 교만해지기 시작했고, 사라와 하갈 사이에 마찰이 생겼습니다. 화가 난 사라는 하갈을 몹시 학대했습니다. 이에 하갈은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가 되었을 때에, 기적적으로 아들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100% 불가능해 보여도 하나님께는 가능합니다. 불가능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젖을 떼는 날,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낼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애굽 여인이 낳은 아들이 어린 이삭을 희롱했습니다. 이를 보고 화가 난 사라는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아예 집밖으로 내어 쫓았습니다.
이때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서러움에 이를 갈았을 것입니다. 마음에 증오심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과 아랍 민족 간의 끊임없는 전쟁이 그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식을 얻고 싶어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한 여인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애굽 여인을 통해 아들을 얻은 죄로 인해 그 결과가 그들의 후손에게까지 이어지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자식을 갖고 싶다고 해서 자식을 갖게 되는 것이 다 축복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리어 그 자식이 부모를 멸시하고 원수가 되는 불행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솔로몬도 그의 소원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어떤 왕보다도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금은보화를 가장 많이 소유했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처와 첩을 천 명씩이나 거느리며 일평생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권세와 명예와 황금을 한 손에 쥐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쾌락을 다 누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타락했습니다. 이처럼 쾌락을 누리면 누릴수록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나중에는 솔로몬은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나라가 둘로 나뉘는 비극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모든 욕망을 이룬 사람이었으나, 많은 아내와 자식들로 인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생은 행복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다하면 행복하고 좋을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무익하고 헛되었다는 결론입니다.
솔로몬은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전 2:16~17)”라고 탄식했습니다.
제삼자가 볼 때에 솔로몬의 부귀영화는 부럽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두가 쓸데없는 헛된 것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 채운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불행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는 죽을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죽는다는 사형선고 앞에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무병장수하며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소원대로 병을 고쳐주시고 15년 더 살게 해주셨습니다. 아마 히스기야는 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을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연장시켜주신 15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여인을 통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12살밖에 안된 이 아들에게 왕권을 물려주고 죽었습니다.
아직 나이 어린 므낫세는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왕이 되자마자 우상을 만들어 놓고 백성들에게까지 우상을 섬기게 했으며, 과거 어느 이방인들보다 열심히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죽였습니다. 결국 나라와 민족을 망하게 했습니다.
사실 히스기야는 죽을병이 걸리기 전까지 얼마나 훌륭한 믿음으로 많은 공적을 쌓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고 덤으로 산 15년 동안 더 살지 아니했던 것만도 못한 불신의 삶을 살다 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욕망을 이루었다고 해서 행복과 축복과 성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원하던 욕망이 이루어짐으로 더 큰 불행을 당할 수 있고 그 불행을 자손만대에까지 물려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건강한 몸으로 오래 살고 싶어 하는 욕망대로 오래 살기보다는, 짧게 살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더 큰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어 하는 신령한 욕망을 가지고 살아갈 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게 해드릴까? 하나님을 위해 어떻게 살아갈까?” 이 마음만 가져도 우리의 믿음이 좋아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것까지 넘치게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을 위해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십니다(전 2:28). 지혜와 지식과 희락이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으며 하나님 안에서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부흥전도자 로랜드 힐 목사가 어느 날 길을 지나가다가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여러 마리의 돼지가 마치 양이 목자를 따라가듯이 한눈도 팔지 않고 어떤 사람을 졸졸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호기심이 생긴 로랜드 목사는 돼지들의 뒤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이 돼지를 도살장으로 인도하는데도 돼지들은 아무런 반항도 없이 그 사람을 따라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신기하게 생각한 힐 목사는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여보세요, 어떻게 해서 당신이 돼지들을 이곳까지 쉽게 몰고 올 수 있었습니까?”, “나에게 비결이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나는 완두콩 바구니를 들고 오면서 계속 몇 알씩 흘려주었을 뿐입니다.”
이때 힐 목사는 ‘아! 그렇구나’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그는 “바로 그거요. 그것이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방법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쾌락의 콩, 욕망의 콩, 우매의 콩, 죄의 콩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콩알을 계속 우리 앞에 뿌리고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콩을 주워 먹으며 생각 없이 계속해서 따라가다가 우리 영혼의 도살장인 지옥으로 가게 되지요. 그 유혹의 콩으로 인해 많은 무리들이 계속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소원을 가지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소원대로 다 이루어진다고 해도 이 세상 욕망은 결국 허무한 것입니다. 지나고 보면 그것이 참 행복도, 진정한 성공도, 축복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 하는 신령한 욕망을 가지고 살 때 진정한 행복과 참 만족이 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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