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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12장

약할 그때가 강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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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6-18 16:18 조회3,2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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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할 그 때에 강함이라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2003년 01월 17일(금요철야)

본문 / 고린도후서 12:1~10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의 간증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환상을 봤고, 계시를 받은 것이 있는데, 사도 바울은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보통 사람이 듣지 못한 말을 들었고, 굉장한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믿음의 눈으로 천국을 보고 있습니다. 천국은 아름답고 좋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아름답고 귀한 것을 봐도 시시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저는 관광지에 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3층천에까지 올라가서 신비한 세계를 봤고, 거기에서 들은 말씀이 있는데, 함부로 털어놓기 어려울 정도로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었습니다.

 

영의 세계를 체험하면, 크게 흥분할 수도 있고, 크게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함부로 이야기하기에는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오해를 불러들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환상을 본 것, 계시 받은 것, 그 3층천에 올라가서 들은 귀한 말을 소개하고 싶지만,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각하고 잘못될까봐 말을 삼갑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도 굉장하지만, 영의 세계는 더 넓고, 더 복잡하고, 상상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체험한 영의 세계는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전부인 양,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완전한 것인 양, 생각하거나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영의 세계를 체험할 때는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소위 입신(入神)한다는 것인데 사람이 갑자기 혼수상태가 되어서 깨어날 동안에 영의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입신이 성령의 역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미혹의 영의 역사도 있기 때문에 미혹의 영에 이끌려서 잘못되면, 정신병자가 되어서 평생 가정생활, 교회생활, 사업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주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 곳에서 함부로 안수기도 받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처럼 영적 체험을 했을 때, 가장 나쁜 것은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체험을 했다. 나는 이런 환상을 봤다. 나는 이런 계시를 받았다.”라고 하면서 갑자기 자신이 마치 선지자가 된 것처럼 행세하며, 그때부터 가는 곳마다 자기자랑이 많고 말썽을 부리고 백해무익한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 아무리 영적 체험을 많이 했어도 그로 인해 교만해졌다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많이 배운 것이나 많이 아는 것은 물론이고,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전도를 많이 한다고 해도, 봉사와 헌금을 많이 해도 교만해지면 백해무익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교만해지면 자만하게 되고, 자랑하기 좋아하고, 칭찬 듣는 것과 대접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기가 은혜를 받았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대접할 생각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한데, 교만해진 사람은 자기가 축복 받은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감사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교만해지면 믿음을 잊어버리게 되고, 받은 은사까지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회개해야 합니다. 겸손히 충고를 받아들이고, 겸손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철저히 무릎 꿇고 회개해야 됩니다.

이때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대적하십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으면 악령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사울 왕이 교만해졌는데 회개하지 않으니까 악령이 역사해서 고통 받고 번뇌하고 못 견디는 것입니다.

악령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그 사람을 통해 밖으로만 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안에서도 악하게 합니다. 악령이 역사하면 괴로워서 괜히 화가 나고, 괜히 사람을 미워하고, 악한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한테 버림 받고,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고후 12:5).

고린도후서 11장 16~1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1장 3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라고 기록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약한 부분이 있는데, 대부분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고 합니다.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도 바울이지만, 조금도 자만한 자가 되지 아니하고, 교만한 자가 되지 않으려고 얼마나 조심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모습이요, 겸손한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을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도들이 받지 못한 계시를 받았고, 다른 사람이 경험한 적 없는 지극히 큰 체험을 했으므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만할까봐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육체의 가시가 너무 괴로워서 사탄의 사자를 떠나게 해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떠나지 않았습니다(고후 12:7~8)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는 아마 육신의 병이었을 것입니다. 이 육신의 병이 사도 바울의 복음사역을 어렵게 만드는 방해물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눈이 건강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의 서신서에 보면 친필로 문안한다는 말이 종종 나옵니다.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골 4:18) 사도 바울이 모든 글을 자기가 직접 다 썼다면 이런 말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교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르면, 그것을 받아쓰고 정서(正書)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편지를 다 적고 나면, 마지막 부분에 사도 바울의 글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7~18절에 보면,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말을 쓸 때는 친필로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 1장 19절에 보면,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눈이 건강하지 못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의 종이 옛날에는 병자들을 다 고치기도 했는데, 사도 바울이 육체의 질고로 어려움을 당한다면, 그 사실이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시험이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이 버린 것은 아닌가, 잘못 된 것은 아닌가’라고 오해하기 쉽고 큰 시험이 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4장 14~1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라고 기록했습니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시험에 들지 않고 사도 바울을 예수님같이 영접해서 얼마나 축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본문 8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가 떠나도록 주께 세 번 간구했지만, 육체의 가시는 떠나지 아니하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합니다(고후 12:9).

사도 바울은 육신의 약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받았는지 모릅니다(고후 12:10). 옛날에는 자기가 장막치고 살았는데, 몸이 약한 사람이 어떻게 장막을 치겠습니까. 또 가는 곳마다 곤란을 얼마나 겪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기뻐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약할 때 하나님이 강하게 해주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아이들이 자라서 잘 걸어 다니고, 잘 뛰어 다니고, 스스로 할 수 있게 되면, 부모가 일일이 간섭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둡니다. 그렇지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에게는 부모가 모든 것을 다 해줍니다.

그런데 조금 컸다고 자기가 알아서 할 때에는 잘 하는 것 같지만, 얼마나 불안하고 잘 넘어지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차라리 약할 때 부모가 조금이라도 다칠까봐 완전히 보호해 주니까, 약할 때 사실은 오히려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힘이 있어 보이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권력을 가지면 얼마나 힘이 있습니까. 돈이 많은 사람, 지식이 많은 사람, 첨단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굉장히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세계적인 명성과 인기를 얻고 있는 사람들도 힘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우리의 행복을 더해줄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돈이 많기 때문에, 원수가 많아질 수도 있고, 오히려 욕을 더 많이 먹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권력과 돈과 세상적인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오히려 불행해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의 복은 감당하지 못하면 복이 아니고 화가 됩니다. 덮어놓고 권세와 명예와 돈이 많으면 좋은 줄 착각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보약이 몸에 좋아도 절제하지 않고 무작정 먹으면 해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복을 주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인색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매우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넘치는 세상 복을 받게 되면, 그것은 복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화가 되는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를 당하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사는 것보다 더 잘되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지금의 형편에서 살아오면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가지고 바르게 살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도 감당하지 못하면서 복을 달라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주면 복이 되지 않고, 오히려 화가 되니까 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축복임을 깨달으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 복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축복 받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 복을 어떤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이 아무리 나를 높여주시고, 부와 권세와 명예를 주셔도 교만하지 않고, 항상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세상 복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대단히 위대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부어주셔도 교만해지지 않고, 방심하지 않고, 방종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안심하고 복을 부어주십니다. 아무리 축복해도 언제나 말씀 가운데 사니까 타락하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주신 복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이 세상 복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십니다. 잘해줄수록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잘해줄수록 좋은 일을 하고, 잘해줄수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보면 안심하고 축복해줘도 됩니다.

 

여러분, 지금 받은 축복의 분량을 가지고, 말씀대로 살아왔는지 반성해보십시오. 내가 지금의 형편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세상 복을 더 주시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복을 더 주신다면, 분명히 타락하고 딴 짓을 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명예와 권세와 돈과 귀한 것들이 불행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마릴린 먼로도 자살했고, 헤밍웨이도 자살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돈이 있고, 명예가 있는 사람이지만, 자신은 너무 괴로워서 자살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세상 복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루아침의 안개와 같습니다. 절대적인 힘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흥하고 망하는 것도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도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잘 살고 못 사는 것, 행복과 불행, 이기고 지는 것, 성공과 실패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명예와 돈만 있으면 자신이 힘이 있고 강하다고 착각하고 안심하거나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다니엘 5장에 보면, 벨사살 왕이 1천 명의 귀인을 초대해서 잔치를 벌입니다. 그 날 밤, 자신이 죽임 당할 것도 모르고 술을 마십니다. 굉장한 권세를 가지고, 1천 명의 귀인을 초대해서 잔치할 때에는 마치 자신의 부귀영화가 영원할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 밤에 메대 사람 다리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그 나라가 다리오에게 넘어갑니다. 그렇게 힘이 있어 보이는데, 하루아침에 안개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이 세상 것들이 있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되고, 교만해서도 안 됩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 명예와 권세, 돈 등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것들이 있을 때보다 없을 때 오히려 더 강하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에게 아무것도 없고, 의지할 것이 없을 때, 누구만 의지하겠습니까?

이 세상의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의 것이 굉장한 줄 알고 의지하고 방심하다가 망하지만, 사도 바울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오로지 주님만 붙잡고,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만 바라보기 때문에 주님만 의지하는 마음이 충만한 그때가 사실은 제일 강한 때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정신을 차리게 되고, 근신하게 되고, 깨어 기도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보면 사실은 그때가 제일 강할 때입니다.

 

성도들에게는 믿음이 보배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산 자요, 믿음이 없으면 죽은 자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생명이 있는 자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는 자입니다.

항상 믿음이 살아있기 위해서는 생명의 운동을 해야 됩니다. 생명의 운동은 바로 믿음의 운동입니다. 믿음을 가지게 하고, 믿음을 자라게 하고, 믿음으로 충만하게 하는 운동이 생명의 운동입니다.

생명의 운동은 기도운동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기도하면 산을 옮깁니다. 못할 일이 없습니다.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참으로 강한 자는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믿음만큼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클수록 강한 자가 됩니다.

골리앗은 자기주먹을 믿는 자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100%로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강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옥중에서도 기뻐했습니다. 어떻게 죽음을 앞두고서도 옥중에서 기뻐할 수가 있었을까요? 믿음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보통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조금도 불안해하거나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언제 우리의 믿음이 강해질까요?

첫째,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볼 때 믿음이 강해집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나를 죽이거나 살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둘째, 현세만 보지 않고, 내세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믿음이 강해집니다.

우리가 현세만 바라보면 불안하고 마음이 약해지지만, 믿음의 눈으로 내세를 바라보고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나는 죽어도 좋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얼마나 강하고 담대해지는지 모릅니다.

 

셋째,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을 때, 믿음이 강해집니다.

죽고 살고, 흥하고 망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믿을 때, 믿음이 강해집니다.

 

넷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을 때, 믿음이 강해집니다.

하나님은 이랬다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니고, 한번 택하셨으면 영원히 택하시고, 우리를 한번 사랑하시면 영원히 사랑하시고,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임을 믿을 때,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을 사랑할 때 믿음이 강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을 때,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강한 자가 됩니다.

 

여섯째,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인이 있을 때 믿음이 강해집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증거가 나타날 때, 우리는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일곱째,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믿음이 강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믿음이 강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사도행전 18장 9절에 보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에 보면,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사도행전 27장 23~25절에 보면,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태풍을 만나서 풍랑에 시달릴 때에도 사도 바울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담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험한 세상에서 살면서 답답할 때,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면, 기쁨이 충만하게 되고, 그 순간에 불안이 사라지고, 걱정이 사라지고, 담대해집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사인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쟁의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인이 눈앞에 보이고 있습니다. 큰 환난, 큰 핍박이 우리 앞에 다가오는 사인이 있습니다.

요즘 청소년들이 컴퓨터를 하면서 인터넷 지식이 없으면 못 사는 줄 압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어린 아이들도 음란물을 보고 많은 청소년이 원조교제를 할 정도로 많이 타락해 있고, 죄악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고생을 하지 않고 커서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줄 알지만, 인간이 악해지고 더러워지면, 인간처럼 세상에서 독한 동물이 없습니다. 짐승보다 더합니다.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회개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얼마나 큰 비극이 닥쳐올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라고 말씀하셨는데(눅 23:28), 주님께서 떠난 후,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완전히 점령당했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끌어당기는 무서운 죄악이 가득한 것을 보면, 정말 울부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이 나라를 위해서, 이 나라의 청소년들을 위해서, 이 나라 젊은이들을 위해서, 죄를 무서워할 줄 모르고 죄를 물 마시듯 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울어야 됩니다. 지금이 얼마나 위기인지 모릅니다. 믿음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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