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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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6-06-01 11:17 조회3,423회 댓글0건본문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2006년 10월 01일(주일예배)
본문 / 누가복음 10:29~37
사람은 본래 혼자가 아닌 더불어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가장 좋은 관계는 ‘사랑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 2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지켜야 할 율법이 많고, 매우 복잡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했습니다(롬 13:6).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지켜도 되고,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납니다. 이 말씀을 지킬 때,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고, 빛에 속한 자가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마귀에게 속한 자가 되고, 어두움에 속한 자가 됩니다.
요한일서 3장 10절에 보면,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어서 13~15절에 보면,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8~12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밝은 세상이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어두워집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점점 어두운 세상이 되는 것은 이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보다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든지 사랑받는 자가 되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베푸는 자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어거스터스’라는 작품을 보면, 아이가 없어 오랫동안 아이를 기다리던 가정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참으로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날 밤 신비한 노인이 산모에게 나타나 “이 아이를 위해 한 가지 소원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한참 생각하다가 “이 아이가 앞으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라고 구했습니다. 이 노인이 “네 소원을 들어주마.”라고 말하고 사라졌습니다.
과연 이 아이는 자라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것은 물론이요, 형제와 선생님과 이웃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얼마 후 그 노인이 이 여인 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아이에 대해 만족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이 여인은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자라면서 사랑만 받다보니, 늘 사랑만 받아야 되는 줄 착각하고 매사에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사랑 받기보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사랑 받기보다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둘째, 자신은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사랑을 베풀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비난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을 대접하기보다 자신이 대접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남에게 주기보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기적인 사람들이 주로 걸리는 병이 바로 ‘섭섭병’입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매사에 불만이 많고, 원망 불평을 잘하며,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두 거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장애인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고, 한 사람은 걷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일을 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걸식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다행히 두 사람은 한 움막에 기거하면서 서로 협력하며 살았습니다. 음식을 얻으러 나갈 때마다 맹인은 걷지 못하는 사람을 등에 업고 그의 다리 역할을 했고, 걷지 못하는 사람은 맹인의 눈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이 구걸하러 갈 때마다 이웃들이 더욱 불쌍히 여기고 음식을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비록 거지였고, 장애인이었으나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어느 해, 그 지방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살림이 그다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두 거지에게 돌아오는 음식의 양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걷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못된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꾀를 부렸습니다. 맹인의 밥그릇에 있는 음식을 자기의 밥그릇으로 슬쩍 옮겨 놓았습니다. 그 결과 걷지 못하는 사람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나, 맹인은 늘 허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해 추운 겨울, 그 날 따라 눈보라가 몹시 휘몰아쳤습니다. 그 날도 두 거지는 구걸하기 위해 움막을 나섰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은 그동안 잘 얻어먹어 몸이 많이 불었습니다. 그러나 맹인은 제대로 얻어먹지 못해 몸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져 현기증으로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맹인의 등에 업혀있던 걷지 못하는 사람도 나동그라졌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그 다음 날 눈 위에 꽁꽁 언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세상살이가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서로 서로 좋은 이웃이 되어줄 때 잘 살게 되는 줄 믿습니다.
본문에 보면, 몇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먼저 강도가 나옵니다. 그리고 강도를 당한 피해자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어떤 사람’이 나오고, 선한 사마리아인, 제사장과 레위인이 나옵니다. 이들 중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해자에게 무관심했습니다.
추측컨대 그들은 자신도 강도를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걸음을 재촉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매우 중요한 일이나 바쁜 일이 생겨 쓰러져 있는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가해자로 오해받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으로 그냥 지나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 도와줄까도 생각했으나 따로 시간을 내야 하고, 여러 가지로 귀찮게 여겨져서 그냥 지나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이 세상에 이런 사람만 있다면, 강도 당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선한 사마리아인만은 그 사람을 성심껏 도와주었습니다.
1964년 어느 날 뉴욕의 퀸즈라는 동네에서 키티 제노비스라는 사람이 살해되었습니다. 이 여인이 공격을 받고 살해되는 장면을 창문을 열고 목격한 사람이 38명이나 되었지만, 아무도 나가서 이 여인을 돕거나 경찰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들을 심문하면서 “왜 구경만 하고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한결 같이 “누군가 다른 사람이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그래서 최근에는 미국의 여러 주에서 ‘위기를 보고도 도와주지 않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로드 아일랜드 주에서는 500불의 벌금을 부과하고 있습니다.
이영호 전 체육부장관이 쓴 〈인생이란 예행연습이 없는 마라톤이야〉라는 책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이 분이 암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어느 건강강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남을 돕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사느냐?”라고 묻는 강사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강사는 현직 의사로, 환자를 진료할 때에 그 환자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판단되면 냉정하게 대한다고 하면서, 그런 사람은 애써 살려 줄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남을 돕겠다는 사람을 치료하는 것도 바쁜데, 자기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사람에게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걸작품을 찾는다면, 그것은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돕는 자를 도우신다”라고 말했습니다.
본문에 여러 명의 사람이 등장하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단연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침략으로 멸망했을 때, 이방 사람들이 사마리아 지방에 와서 살게 됨으로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혼혈족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동안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천대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참으로 마음씨가 좋은 선한 이웃이었습니다.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그에게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봐주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두 데나리온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이 사람을 돌봐주라고 부탁하고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웃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웃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말로 사랑하고 혀로만 사랑하지 행함과 진실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6~18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 희생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주고, 시간을 들이고, 물질로 돕고, 필요하다면 목숨까지도 주는 것입니다.
미국 역사상 최고의 부자로 손꼽히는 록펠러는 52세 때 근무력증, 탈모증, 불면증, 위궤양 등으로 인해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나무 막대기처럼 말라갔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자 그처럼 억척같이 모았던 재산도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의 삶을 바꾼 것은 누가복음 6장 38절의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동안 피상적인 신앙생활을 해왔던 록펠러는 당장 자신의 부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1년 후에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여 98세까지 장수했습니다.
최근 심리학자들은 실제로 주는 사람이 더 건강하고 행복하고 장수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에게 주는 사람이 고통과 아픔을 적게 느끼고,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며, 스트레스도 적게 받고, 질병에도 덜 걸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 중에는 교회를 싫어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말로는 사랑을 외치면서 도무지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아무런 도움이나 유익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이 세상 사람들이 사랑에 목말라 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 밖에는 사랑에 목마른 사람들을 돌봐 줄 곳이 없는데도 교회가 사랑을 베풀지 않으므로 실망한 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중에도 부끄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나라의 소망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최고의 전도법은 사랑을 많이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찾아가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그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나라를 하루 속히 복음화 하는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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